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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200회 마지막 편)

밝은여명 2022. 7. 18. 20:24

 

?방랑시인 김삿갓 (200회 마지막 편)? 

승피백운 우화등선 乘彼白雲 羽化登仙
저 하얀 구름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돌이켜보면 기구하기 짝이 없었던 50 평생이었다.
그러기에 혼미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조소수소 개유거 鳥巢獸巢 皆有居
날짐승도 길짐승도 제 집이 있건만 

고아평생 독자상 顧我平生 獨自傷
나는 한평생 혼자 슬프게 살아왔노라.

망혜죽장 로천리 芒鞋竹杖 路千里
짚신에 지팡이 끌고 천릿길 떠돌며 

수성운심 가중방 水性雲心 家中方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우인불가 원천난 尤人不可 怨天難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이 못 되어 

세모비회 여촌장 歲暮悲懷 餘寸腸
해마다 해가 저물면 혼자 슬퍼했노라.

초년유위 득락지 初年有謂 得樂地
어려서는 이른바 넉넉한 집에 태어나 

한북지오 생장향 漢北知吾 生長鄕
한강가 이름 있는 고향에서 자랐노라.

잠영선세 부귀문 簪纓先世 富貴門
조상은 부귀영화를 누려 왔던 사람   

화류장안 명승생 花柳長安 名勝生
장안에서도 이름 높던 가문이었다. 

인인래하 농장경 隣人來賀 弄璋慶
이웃 사람들 생남했다 축하해 주며 

조만귀기 관개장 早晩歸期 冠蓋場
언젠가는 출세하리라 기대했건만 

수모초장 명점기 鬚毛稍長 命漸奇
수염이 나면서 운명이 점차 기구해져    

회겁잔문 번해상 灰劫殘門 飜海桑
멸문(재가 되도록 잔인한 위협으로)으로
상전이 벽해되듯 뒤집어졌네. 

의무친척 세정박 依無親戚 世情薄
의지할 친척없고 인심도 각박한데 

곡진야양 가사황 哭盡爺孃 家事荒
부모마저 돌아가셔 집안은 황폐했도다. 

종남효종 일납이 終南曉鐘 一納履
새벽 종소리 들으며 방랑길에 오르니 

풍토이방 심세량 風土異邦 心細量
생소한 객지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심유이역 수구고 心猶異域 首丘孤
마음은 고향 그리는 떠돌이 여호같고 

세역궁도 촉번양 勢亦窮途 觸藩羊
신세는 궁지에 몰린 양 같은 나로다. 

시 조차 읊을 기운이 떨어진 김삿갓은 

잠시 뜸을 두었다가 다시 읊기 시작했다. 

남주종고 과객다 南州從古 過客多
남쪽 지방은 자고로 과객이 많은 곳 

전봉부평 경기상 轉蓬浮萍 經幾霜
부평초 처럼 떠돌아가기 몇몇 해던고 

요두행세 기본습 搖頭行勢 豈本習
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오 

설구도생 유소장 楔口圖生 惟所長
먹고 살아가기 위해 버릇이 되었도다. 

광음점향 차건실 光陰漸向 此巾失
그런 중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 

삼각청산 하묘망 三角靑山 何渺茫
삼각산 푸른 모습 생각할수록 아득하네. 


강산걸호 관천문 江山乞號 慣千門
떠돌며 구걸한 집 수없이 많았으나 

풍월행장 공일낭 風月行裝 空一囊
풍월 읊는 행랑은 언제나 비었도다. 

천금지가 만석군 千金之家 萬石君
큰 부자 작은 부자 고루 찾아 다니며 

후박가풍 균시상 厚薄家風 均試嘗
후하고 박한 가풍 모조리 맛보았노라. 

신궁매우 속안백 身窮每遇 俗眼白
신세가 기구해 남의 눈총만 받다 보니 

세거편상 발발창 歲去偏傷 髮髮蒼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귀혜역난 저역난 歸兮亦難 佇亦難
돌아가자니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려워 

기구방황 중로방 幾口彷徨 中路傍
노상에서 방황하기 몇 날 몇 해이던고.

김삿갓은 여기까지 읇조리다가 마침내 

기운이 진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응구첩대(應口輒對)

로 시를 읊어댄 것은 그의 타고난 천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를 읊을 기력조차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배는 가벼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감고 있는 김삿갓의 심안心眼에는
홀연히 한 조각 하얀 구름이 떠올라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누군가가 

그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며 

"승피백운(乘彼白雲) 우화등선(羽化登仙)!
저 하얀 구름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하고 읊조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 왔다. 

김삿갓은 그 소리가 들려오자, 별안간 몸을 꿈틀하며,
"뭐? 승피백운 우화등선? "하고 입속말로 뇌까리다가,
다음 순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루 편답하며
수많은 시를 뿌려 놓은 천재 시인 김삿갓은, 

마침내 전라도 동복 적벽강 나룻배 위에서 영구 귀천했으니,
때는 지금으로 부터 155년 전인 1863년 철종14년 3월 29일이요,
향년 56세이었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사후(死後)에 전라도 땅에 묻혔다가,
그의 둘째 아들  익균(翼均)에 의해 고향인 영월땅으로 이장(移葬)되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기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216번지로 

그의 유택(幽宅) (묘)에 주소를 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통상은 매장을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북방 유목 민족들은 새를 숭배하여 장례를 

치룰 때 조장(鳥葬), 천장(天葬)을 한다. 

죽은 영혼이 하늘나라로 접근하는 가장 지름길을 새라는 

동물로 보았기에, 새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뜯어 먹도록 

함으로써 영혼이 하늘에 가깝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승피백운 우화등선" 방랑시인 김삿갓의 마지막 남긴 말을 

해석하여 보면, 그의 영혼(靈魂)은  분명히 새가 되어 창공을 

마음껏 훨~훨 날아서 하늘나라에 갔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눈꺼풀  움직일 힘도 없이 죽어가는 이가 옆에서 

받아 적는 이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어찌 글로 남겼으랴? 

그런데 잠시 미리 흝어보니 거기에도 바로 잡거나 한자 원문을 

찾아 헤매야할 곳이 눈에 띈다. 허허~~

[김삿갓 김병연의 생애 요약] 

김병연은 1807년에 태어나1863년(고종 즉위년) 에 객사함.
조선후기 방랑시인으로 자는 난고,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안동 김씨로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음. 선천부사였던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으나, 

형 병하와 노복 김성수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가 숨어 

살다가 뒷날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살았다 

*멸족 : 대역죄를 지은 가문을 멸(예, 3대9족을 잡아죽이)하는 벌
(언제든지 발각되면 바로 죽임을 당함)

 

*폐족 : 조상이 나라에 큰 죄를 지어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는 벌.
(발각되어도 별다른 벌은 받지않고 벼슬길만 막힘) 

과거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으나, 집안 내력을 몰랐던 김병연은
자신의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를 택했고 장원을 했지만
어머니로부터 집안 내력을 들은 김병연은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사회적 

멸시 등을 피해 방랑길에 올랐고, 

57세로 전라남도 동북에서 객사하기까지 
삿갓을 쓰고 전국각지를 유랑하였으며, 
발걸음이 미치는 곳마다 많은 시를 남겼다. 

그의 주검은 뒷날 아비의 사망소식을 들은 둘째 아들 익균이 

아비의 유해를 영월의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그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고 
회화적으로 파격적 요인이 되었으며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수많은 한시가 구전되고 있다. 

또 그때 김삿갓이라는 걸출한 시인이 전국을 방랑하며 곳곳에 

시를 남기고 다닌다는 게 풍문으로 전해지면서 다른 유랑 풍류객들, 

특히, 문재가 있어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던 서출들도 삿갓을 쓰고 

김삿갓을 사칭하거나 김삿갓의 차림으로 유랑하면서 남긴 시도 더러는 

있을 것인데 

함량미달인 것이야 바로 분별 되지만, 
시풍이 비슷한 수준있는 시들은 더러는 김삿갓 시로 채록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세기는 조선조 양반신분체제가 동요되어
계급적 혼란기를 맞이하는 시기였다. 

영·정조가 탕평책을 썼던 동안 정계는 대체로 안정되어 있었으나 
순조가 어린나이로 즉위하자 소위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제 정치는 양반들의 공존이나 상호간의 다툼에서가 아니라 
일개 척족의 세력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로 변화하였다. 

세도정치에 의한 권력집중은 정치의 문란을 가져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농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점점 양반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이런 

가운데에서 농민들은 사회적 위치에 눈뜨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김병연은 1천여 편의 시를 쓴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까지 456편의 시가 찾아졌다. 

그가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사람이 된 것은,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이야기들을
그것도 김삿갓이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꽃잎처럼 

낙엽처럼 날려버린 시들을 

이응수라는 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으고 정리하여, 
비로소 그가 죽은 지 76년 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 ‘김립 시집’을 엮어 냈기 때문이며, 

그 속에 실린 내용과 형식이 다양한 시들과
흥미있고 통쾌한 일화들을 자료로 삼아, 
여러시인· 작가들이 시집과 소설로 발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근래에 와서 다분히 흥미 위주로 보아온 그의 시들을, 
형식의 파격성과 내용의 민중성을 문학사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서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하다. 

그는 5세 때부터 이곳저곳으로 피해 살아야 했고, 청년기 이후에는 

방랑생활로 일관했기 때문에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대부분

을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그가 남긴 시와 일화들이 더욱 신비로우며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김삿갓, 그에게는 수많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 

그가 개성에 갔을 때
어느 집 문앞에서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자, 

그 집주인은 문을 닫아걸고 땔감이 없어 못 재워준다고 했다. 
이 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시가 이러했다. 

[읍명개성 하폐성 邑名開城 何閉城
고을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며 

산명송악 기무신 山名松岳 豈無薪
산 이름은 송악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느냐] 

이 시는 해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한문 또는 한시를 대중화한 것이다. 
이런 것은 언문을 섞어 짓는 그의 모습에서 
또 달리 나타난다. 

김삿갓은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기성 권위에도 도전하고 백성과 함께 숨쉬며 
탈속한 현대판 ‘참여시인’이었고 
요즘의 말로 ‘민중시인’이었다고 하겠다.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세상을 기탄(忌憚)없이

풍자하고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해학으로 승화시켜 시로 
표현한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 받기도 하지만 

어머니와 부인과 자식이 있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소홀히 하며 세상을 등지고 자신만의 길을 간 참으로 
불효하고, 무책임한 문약에 빠진 사람으로 지탄을 

받기도 한다.

마무리 하면서~~ 

김삿갓과 同行한지 어느 새 해가 바뀌고
政權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節氣도 바뀌어 

가고 있는 지금 

七旬 古稀 맞는 내 親舊들 앞날에
저 하늘의 榮光이 함께 하길 ~~ 
저 하늘의 祝福이 함께 하길~~

자고칠십 이래희 自古七十 而來稀
현부수빈 래년야 現夫誰頻 來年也
년다물과 심신수 年多勿誇 心身修
여생작락 물허송 餘生作樂 勿虛送 

옛부터 인생 칠십이 귀하게 온다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누구에겐들 빈번히 오는 나이이니
나이 많다 자랑말고 몸과 마음을 잘 수련하여
여생을 허송하지말고 즐겁게 지내시라
[詩 : 東波 金正穆]

지금까지 잘 보셨나요?
항상 건강하시고 매일 매일 즐거운날 되십시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1회부터 109회를 받지 

보내지 못해서 무척이나 아쉬움이 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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