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모음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법정스님
밝은여명
2022. 12. 20. 09:39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법정스님
새해 달력을 보니 지나온 한 해가 묵은 세월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면서 또 한 해를 소모해버렸는지 새삼스레 묻는다.
그러다가 문득 내 남은 세월의 잔고는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이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디어진 감성,
저녁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 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이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섬이다.
깨어있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종착점에 이를 때까자신을 묵혀두지 않고
거듭거듭 새롭게 일깨워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이 다음 생의 문전에 섰을 때도 당당할 것이다.
이제 나이도 들만큼 들었으니 그만 쉬라는 이웃의 권고를 듣고
디오게네스는 이와 같이 말한다.
"내가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결승점이 가까워 졌다고 해서 그만 멈추어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