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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 사이

밝은여명 2023. 3. 7. 14:25

❤ 아내와 나 사이 ❤
시 /이생 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시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이생진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와 

낭송하는 ‘나’와 

그것을 듣고있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