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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통해 살펴본 순창고추장 역사 본문
♤문헌 통해 살펴본 순창고추장 역사
《소문사설》에 실린 순창고추장 조리법-출처 네이버 포스트
콩을 주원료로 발효해 제조하는 다른 장류와는 달리 고추장은 고추를 부재료로 사용해 색과 맛이 조화되도록 만드는 향신조미료이다. 따라서 고추장 역사에서 고추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고추를 재배해 고추장을 만들어 먹은 것일까? 그리고 순창고추장은 언제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을까?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
한국인은 언제부터 고추를 먹었을까? 지금까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해(선조25년, 1592)에 일본에서 전래되었다는 설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최남선이 역사개론서 《고사통》(故事通ㆍ1943)에서 《산림경제》와 《성호사설》에 고추와 관련된 이름과 재배법이 기술되고 있음을 근거로 유럽산 고추가 담배와 같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갖고 들어왔을 것이라 추정하게 되었다.
이성우 한양대 교수(작고)는 〈고추의 역사와 품질 평가에 관한 연구〉(1979)라는 논문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이수광이 1613년에 지은 《지봉유설》에서 말하기로 ‘고추에는 독이 있다. 일본에서 건너 온 것이기에 왜겨자라 한다. 그렇다면 고추는 다른 여러 문화 전래와는 다르게, 일본을 통해 이 땅에 들어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 글을 통해 대다수 사람이 고추가 임진왜란 시기에 한국에 유입되었다고 믿어왔고, 이 글을 인용해 고추 역사에 대해 논하곤 했다. 이후 각종 교과서에도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에 전래되었다”고 기술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에 반하는 다양한 연구들도 존재한다. 일본이 아닌 중국으로부터 유입됐다는 설도 있다. 고추를 당초(唐椒)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고추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한국에 자생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일본의 《대화본초》(1709) 《화한삼재도회》(1712)에는 고추가 한국에서 전래됐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일본 나라 지방 일기인 《다문원일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으로부터 고추를 가져왔는데 맵기가 비교할 바 없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고추 전래 새로운 주장
권대영 한국식품연구원 박사(책임연구원)는 〈고추 전래의 진실〉 등 여러 논문에서 ‘고추 일본 전래설’을 근거 없는 가설에 불과하다며 통렬히 비판한다. 권 박사는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고추가 한반도에 보급된 것이 적어도 1000년 전이라고 주장한다.
한글 창제(1443년) 이후 발행된 《훈몽자회》(1527년)에 ‘椒(초)’자의 한글 표기로 ‘고쵸’라고 적혀 있고, 《향약집성방》(1433년)ㆍ《의방유취》(1445년)ㆍ《식료찬요》(1460년)에도 ‘椒醬(초장)’이란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 초장이 바로 고추장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권 박사는 “근대 이전에는 농경학적으로 고추가 임진왜란 때 들어와 우리나라 전국에서 재배되려면 수백 년이 걸렸을 것이며, 식품학적으로 우리 고추 품종에서 고추장과 김치를 동시에 발전해 전국으로 알려진 대표 식품으로 발전하려면 수천 년이 걸린다”며 “생물학적으로 결론을 내리면 우리나라에는 고추가 짧게 봐도 몇 십만 년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고추의 국내 유입경로를 입증할만한 과학적 증거와 고고학적 자료는 안타깝게도 많이 남아있지 않다. 조선시대 여러 전란으로 인해 많은 고서와 자료가 유실됐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농경학적ㆍ식품학적ㆍ진화계통학적 관점에서 고추 유입경로를 추적해 왔지만, 아직 완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터부시로 사용하던 고추를 사용한 금줄이 사용된 경로, 민화ㆍ벽화ㆍ미술품 등에 대한 추적, 민속학ㆍ역사학ㆍ어문학을 통한 연구, 이성계ㆍ무학대사와 관련해 고려 말부터 순창고추장이 유명했던 것을 학술적으로 증명하는 것 등 장기간에 걸친 다방면의 연구가 절실하다 하겠다.
《소문사설》에 실린 순창고추장 조리법
순창고추장 기록은 《소문사설》에 처음 보인다. 《소문사설》(謏聞事說)은 ‘들은 것은 적지만 그래도 아는 대로 말한다’라는 뜻으로, 조선 숙종ㆍ경종 때 어의를 지낸 이시필(李時弼)이 1720년경에 편찬한 책이다. 네 차례에 걸쳐 중국 사신 행렬을 따라갔던 저자는 임금에게 올린 음식과 중국ㆍ일본에서 맛보거나 전해들은 음식 조리법을 적어 편찬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종로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순창고추장 조리법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쑤어 놓은 콩 두 말과 흰 쌀가루 다섯 되를 섞고, 고운 가루가 되도록 마구 찧어서 빈 섬 속에 넣는다. 1, 2월에 이레 동안 햇볕에 말린 뒤 좋은 고춧가루 여섯 되를 섞고, 또 엿기름 한 되, 찹쌀 한 되를 모두 가루로 만들고 진하게 쑤어 빨리 식힌 뒤, 단간장을 적당히 넣는다.” -(중략)
어의 이시필이 순창고추장 만드는 법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순창고추장은 당시 왕실고추장이었을 것이며, 이미 전국에서 제일 맛있는 고추장으로 소문났음을 알 수 있다.
영조의 고추장 사랑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고추장 사랑은 각별했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기록돼 있다. 영조는 65세 때 어느 날 여러 의관과 나눈 대화에서 “가을보리밥ㆍ고초장(고추장)ㆍ즙저(짠맛이 나는 장아찌)가 입에 잘 맞는다”고 하였다. 75세 때는 “송이ㆍ생 전복ㆍ새끼 꿩ㆍ고추장은 네 가지 별미라. 이것들 덕분에 잘 먹었다. 이로써 보면 아직 내 입맛이 완전히 늙지는 않았나보다”라고 말했다.
영조는 고추장 사랑에 빠졌고, 고추장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경이 되었다. 맛 좋은 사가(私家)의 고추장을 계속 반입하게 했다. 특히 이인좌의 난 당시 청주목사를 지내며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한 조언신(趙彦臣)의 아들 조종부(趙宗溥) 집에서 담은 고추장은 영조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기력을 회복시켜주었기에 오랫동안 바쳐졌다. 심지어 조종부가 죽고 5년이 지난 후에도 그가 화제에 오르자 영조는 고추장을 떠올렸다고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조종부의 본관은 순창조씨이다. 조종부 집안에서 오랫동안 왕실에 순창고추장을 진상한 것으로 보인다.
이세보와 순창고추장 선물
순창고추장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세보(李世輔ㆍ1832~1895)다. 그는 왕족(경평군 이인응)으로 철종의 종제(從弟)이자, 흥선대원군의 육촌 아우다. 또한 여주목사ㆍ형조판서ㆍ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458수의 시조를 지어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시조를 남긴 시조작가이기도 하다.
순창과 이세보의 인연은 그의 나이 29세였던 1860년(철종 11) 봄에 아버지 이단화(李端和)가 순창군수로 부임하면서다. 아버지를 찾아와 순창 지역을 유람하면서 명승지 8곳을 노래한 〈순창8경〉이라는 연시조를 남겼고, 군청 앞에 있던 누정 응향각과 화방재에서 풍류를 노래한 시조 4수가 전한다. 또 순창ㆍ순천ㆍ화순 지역을 유람하면서 쓴 가사 작품 〈상사별곡〉을 남기는 등 순창을 유난히 사랑한 사람이었다.
김건우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지난 2018년 모 일간지에 이세보와 인계 마흘리(馬屹里) 전주이씨 집안이 주고받은 편지 일부를 소개했다. 김 교수에 의하면 순창 전주이씨는 선조(宣祖)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인성군의 후손으로, 이환규(李桓圭)의 둘째 아들 이종백이 한양에서 순창으로 내려오면서 본격적으로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음은 당시 충북 보은에 거주하던 이세보가 1868년(고종 5년) 1월 18일에 인계 마동(현재 마흘리) 전주이씨 집안에 보낸 편지 내용 일부이다.
“고추장(古秋醬)을 먼 이곳까지 보내주시니, 감사한 마음이야 어찌 물품에 있겠습니까. 더욱 두터운 성의가 많아 감격스럽습니다. 언제쯤 왕림하시겠습니까. 간절히 바랍니다. 이곳에서 극히 구하기 어려운 물품은 고춧가루입니다. 부디 몇 말을 구해 보내주십시오. 값은 편지로 알려주시면 즉시 갚겠습니다. 잊지 마시고 각별히 주선해주십시오. 거듭 말씀드립니다.”
이세보는 새해 안부를 묻고서 보낸 준 고추장에 감사드리며 보은에는 고춧가루를 구하기 매우 어려우니 꼭 보내 주고 값은 편지로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1874년(고종 11년) 10월 21일과 11월 15일에도 순창에 보낸 답장에서 (이세보를 대신해)보은에 사는 이종응(李宗應)이 “보내준 고추를 받아서 잘 사용해 감사했다. 이어 부탁한 고춧가루를 유념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고춧가루 부탁뿐만 아니라 선산 관리, 산송, 매매 대금 환수 등 보은 측에서 여러 차례 부탁했다. 순창 전주이씨 가문은 순창고추장이라는 선물을 적절하게 활용해 종중과 편지를 교환하면서 관계망을 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문헌과 언론에 비친 순창고추장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이규경(李圭景)이 조선 후기 효종 때 발간한 백과사전류 책이다. 번초(蕃椒)의 임진왜란 시기 전래, 우리나라 고추의 우수함, 순창고추장이 전국에 유명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울러 매서운 바람을 고초풍(苦椒風)이라고 하여 이미 고추가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순조 9년(1809) 편찬된 《규합총서》에도 순창고추장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으며, 《의약월보》(1914)에도 지역명물로 순창고추장을 기록하고 있다. 《해동죽지》(1925)에도 순창고추장이 전국 으뜸이며,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1937)에서도 조선 각지의 명물에 순창고추장을 꼽고 있다. 《개벽》 61호(1925), 동아일보(1927, 1931), 경향신문(1966, 1967) 등에 순창고추장은 맛으로 유명하며, 담그는 재료부터 다르다며 만드는 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문헌 내용을 종합해 보면 순창고추장이 오랫동안 왕실에서 널리 사랑받고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에 무학대사와 함께 구림 만일사 주변 민가에 들러 고추장을 맛본 후 “하도 맛이 있어 왕이 된 후 진상하라 하였다”는 구전이 그냥 생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구림 안정리 만일사 경내에 있는 만일사비. “만일사는 백제 때 창건된 사찰로, 우리 조선 태조대왕(이성계) 때에 이르러 무학과 나옹 선사가 무너진 사찰을 중창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출처 : 열린순창(http://www.opench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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