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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 사이

밝은여명 2023. 4. 30. 09:08

♥아내와 나 사이
 詩 人 / 李生珍(1929~)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詩낭송대회"
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李生珍 詩人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 와
낭송하는  ‘나’ 와
그것을 듣고있는  ‘나’ 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
 다시 모르는 사이로 /
 돌아가는 세월”
 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 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오늘도 당신은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도록 화이팅!!
아자아자 힘내세요.
 
김남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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