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아침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본문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아내가 물었다.
"그래, 낮엔 어딜 갔다 온거유?"
"가긴 어딜가? 그냥 바람이나 쐬고 왔지!"
남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내일은 무얼 할거유?"
"하긴 무얼해? 고추모나 심어야지!"
"내일이 무슨 날인지나 아시우?"
"날은 무신날! 맨날 그날이 그날이지."
"어버이날이라고 옆집 창식이 창길이는 벌써 왔습디다."
남편은 아무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당겼다.
"다른 집 자식은 철 되고 때 되면 다들 찾아 오는데,
우리 집 자식은 뭐가 그리 바쁜지? 원!"
아내는 긴 한숨을 몰아쉬며 푸념을 내뱉었다.
"오지도 않는 자식놈 얘긴 왜 해?"
"왜 하긴? 하도 서운해서 그러지요.
서운하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유?"
"어험!"
남편은 할 말이 없어 헛기침만 거푸 했다.
'세상일을 모두 우리 자식만 하는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자식 잘못 기른 내 죄지 내 죄야!'
아내는 밥상을 치우며 푸념아닌 푸념을 했다.
"어험! 안 오는 자식 기다리면 뭘해?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남편은 아내의 푸념이 듣기 싫은지 휭하니 밖으로 나갔다.
어버이 날이 밝았다. 조용하던 마을에 아침부터
이집저집 승용차가 들락 거렸다.
"아니, 이 양반이 아침 밥도 안 드시고 어딜 가셨나?
고추모를 심겠다더니 비닐하우스에 고추모도 안 뽑고?"
아내는 이곳 저곳 아버님을 찾아봐도 간곳이 없었다.
'혹시 광에서 무얼하고 계시나?'
광문을 열고 들어 갔다. 아내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바리바리 싸 놓은 낯설은 짐봇다리 두 개 눈에 띠었다.
봇다리를 풀어보니 참기름 한 병, 고추가루 한봉지,
또 엄나무 껍질이 가득 담겼다.
큰아들이 늘 관절염 신경통에 고생하는 걸 알고
준비해 두었던 남편의 사랑이었다.
또 다른 봇다리를 풀자 거기에도 참기름 한 병에 고추가루 한봉지,
민들레 뿌리가 가득 담겼다?
늘 간이 안 좋아 고생하는 작은 아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다.
아내는 그걸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언제 이렇게 준비해 두었는지.
엄나무 껍질을 구하려면 높은산에 가야 하는데, 언제 높은 산을 다녀 왔는지.
요즘에는 민들레도 구하기 힘들어 며칠을 캐야 저 만치 되는데,
어제 하루종일 안 보이더니 읍내에 나가 참기름을 짜 오셨구나.
자식 놈이 어떻게 이 마음을 알려는지.
아내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동네 어귀 장승백이에 남편이 홀로 앉았다.
구부러진 허리에 초췌한 모습으로 저 멀리 동네 입구만 바라보았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잘 알기에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아니 여기서 뭘 하시우? 고추모는 안 뽑구?"
"......"
"청승 떨지말구 어서 갑시다. 작년에도 안 오던 자식놈이 금년이라구 오겠수?"
아내가 손을 잡고 이끌자 그제서야 남편은 못이기는 척 일어났다.
"오늘 날씨 왜 이리 좋은기여? 어서 가서 아침먹고 고추모나 심읍시다"
"......"
남편은 아무 말없이 따라 오면서도 자꾸 동네어귀만 쳐다보았다.
"없는 자식복이 어디서 갑자기 생긴다우? 그냥 없는 듯 잊고 삽시다."
"험험!" 헛기침을 하며 따라오는 남편이 애처로워 보였다.
집에 돌아와 아들오면 잡아주려고 애지중지 길렸던 씨암탉을 보고
"오늘은 어버이 날이니 우리 둘이 씨암탉이나 잡아 먹읍시다.
까짓거 아끼면 무얼하겠수? 자식 복두 없는데." "......"
"오늘은 고추모고 뭐고 그냥 하루 편히 쉽시다.
괜히 마음도 안 좋은데 억지로 일하다 병나면 큰일 아니우?
다른 집은 아들딸이 와서 좋은 음식점에 외식이다 뭐다 하는데,
우린 씨암닭 잡아 술이나 한잔 합시다." "험험!"
그때였다. 아침상을 마주하고 한 술 뜨려 하는데, "아브이 어므이~"
하면서 재너머 시집간 막내딸과 사위가 들이 닥쳤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심하게 저는 딸이라 늘 구박만
주었던 딸인데, 사위랑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헐레벌떡 들어왔다.
"아니 니가 어떻게? 제 몸 하나 잘 가누지 못하는 니가 어떻게 왔니?"
"어므이 아브이! 오늘 어브이날이라 왔어.
아브이 좋아하는 쑥버무리를 해가지고 왔어."
그러면서 아직 따끈따끈한 쑥버무리를 내 놓는 게 아닌가!
"아니 이 아침에 어떻게 이 떡을 만들었니?"
"저이하고 나하구 오늘 새벽부터 만들었어. 맛이 어떨련지 몰라.
히히" "이보게! 박서방! 어떻게 된건가?"
"네, 장모님. 저 사람이 어제부터 난리를 첬어요.
장인 어른께서 쑥버무리를 좋아하신다고 쑥 뜯으러 가자고 난리를 치고,
또 밤새 울거내고 새벽부터 만들었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땀을
흘리고 왔어 천천히 오지?"
"저 사람이 쑥버무리는 따끈할 때 먹어야 맛좋다며 식기전에 아버님께
드려야 한다고 뛰다시피해서 가지고 왔어유"
"에이구, 몸도 성치않은 자식인데..."
소아마비로 인해 딸이 몸이 성치 않아 몇 년전 한쪽 다리가 불구인
사위를 얻어 시집을 보냈던 딸이었다.
언제나 부부의 마음 한구석에 아픔으로 자리했던 딸이었기에
그저 두 내외 잘 살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느새 아내의
눈가에는 눈물이 배어났다. "참! 아브이 어므이 이거!"
하면서 카네이션 두 송이를 꺼내어 내밀었다.
"저이가 어제 장터에 가서 사왔어! 이쁘지? 히히!내가 달아 드릴께."
하면서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 주었다.
"아브이 어므이 오래오래 살아야돼! 알았지? 히히"
"그래, 알았다. 오래 살으마! 너희도 행복하게 잘 살아라! 박서방 정말 고맙네!"
"아니에요. 장모님! 두 분 정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유" "그려그려.
정말 고맙네!" "아브이 어므이, 어서 이 쑥버무리 먹어봐.
맛이 어떨런지 몰라. 히히" "그래, 알았다."
부부는 쑥버무리를 입에 넣으며 목젖이 울컥함을 느꼈다.
눈가엔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애써 참으며
"그래, 참 맛있구나! 이렇게 맛나는 쑥버무리를 처음 먹어 보는구나.
당신도 그렇지요?"
"흠흠, 으응...." 남편은 목이 메어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참! 술, 술"
사위가 잊었다는듯 보따리에서 술병을 꺼냈다. "이거 아브이 어므이
드린다구 박서방이 산에서 캔 산삼주야.
작년에 산에 갔다 캤는데, 팔자구 해두 장인어른 드린다고 안팔구 술
담은거야." "박서방이 산삼을 캤구먼?"
"네!작년에 매봉산에서 한뿌리 캤시유." "에구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산삼주를 받아든 남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평생 홀아비로 늙어갈 몸인데 저렇게 이쁜 색시를 주셔서 넘 고마워유."
"무슨 소린가? 몸도 성치않는 자식을 받아 준 자네가 고맙지!"
"아녀유? 저한테는 너무 과분한 색시구먼유." "그려그려. 앞으로도
못난 자식 잘 부탁하네." "장인장모님! 오래오래 사세유."
남편은 눈시울이 뜨거워 더는 앉질 못하고 슬며시 일어나 나갔다.
병신 자식이라 불쌍하게만 여겼지 아들처럼 공부도 안 시키고,
결혼식도 안 올리고, 그냥 시집을 보낸 딸 자식이었는데 ...
그저 시집보냈으니 신경 안 썼던 그 자식이 어버이날이라고
이렇게 불쑥 찾아 올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더욱이 좋아하는
쑥버무리를 밤을 새워가며 해가지고 올 줄이야.
내 평생 이렇게 맛나는 떡을 먹어 보았던가?
무엇이든 아들 형제만 주려고 생각했지 병신 딸은 언제나 안중에 없었다.
행여 병신 자식이라고 업신 여겼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불구의 몸이지만 딸의 마음이 저렇게 깊은 줄 이제서야 알았다.
아들 때문에 서운했던 마음이 딸로 인해 풀어졌다.
먼 아들보다 가까운 딸 자식이 소중함을 그때서야 알았다.
그러면서 가슴 저 깊은 곳이 아려왔다.
정말 딸자식이 고마웠다. 아니, 많이 미안했다.
한참 뒤 밖에서 씨 암닭 잡는 소리가 들렸다.
잘난 자식들 주려고 키웠는데 못난(?) 딸자식 주려고 잡았다.
"우리 귀한 사위 줄려고 장인이 씨 암닭 잡나보네."
"어이구. 황송해서 어쩌지요? 장모님?"
"아닐세, 자네는 씨암닭 먹을 자격 충분하네!"
"장모님, 고마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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