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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서강변 청령포에서 바라보는 단종의 슬픈 운명

밝은여명 2023. 5. 17. 18:35

♣영월 서강변 청령포에서 바라보는 단종의 슬픈 운명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명승을 만나게 되는데, 아름다운

곳일수록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영월군 서강 가장자리에 있는 청령포다. 서강이라 불리는 평창강은 길이 149㎞로,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 남동 계곡에서 발원해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와 팔괴리 사이에서

동강과 합류하고 그곳에서 마침내 굵은 물줄기가 되면서 남한강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다.

서강 저 멀리 옅은 안개 속으로 푸른 산들이 연이어 보이고 그 아랫자락에 청령포가 있다. 영월군에는

조선 왕조 여섯 번째 임금이면서 비운의 임금인 단종 무덤인 장릉을 비롯해 단종과 관련된 역사유적이

곳곳에 널려 있고 그에 얽힌 땅 이름과 전설이 많다.

서면 광전리에 있는 고개는 단종이 유배를 올 적에 넘었다고 해서 임금이 오른 고개라는 뜻으로 등치라고

불렸고, 서면 신천리에 있는 고개는 오랫동안 흐리던 날씨가 단종이 넘으려고 하자 맑게 개어서 단종이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해서 '배일치'라고 불리운다.

신천리 관란정(觀瀾亭) 밑에는 ‘아이고 바우‘ 가 있는데, 이 바위에서 ’아이고‘를 세 번 외치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또 다른 이야기는 불의한 정변(政變)이나 수령의 악정이 있을 때 선비들이 이

바위에 모여 ’아이고, 아이고‘하며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이곳 아이고 바위에서 통곡하면 강원감사가

그 수령의 잘잘못을 내탐했다고 하며 악한 수령들은 그 선비들을 탄압했다고 한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두 강 안쪽에 단종의 장릉(莊陵)이 있다. 숙종이 병자년에 단종의 왕위를

추복追復하고 능호를 봉하였던 것이다. 또 이보다 앞서 육신(六臣)의 묘를 능 곁에 지었으니 매우 장한

뜻이었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영월 땅에는 비운의 임금 단종의 자취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세종의 큰아들인 문종이 2년 만에

병사하자 단종은 어린 나이인 12세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3년 후인 1455년에 첫째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 즉 세조에 의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를 비롯한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을 임금의 자리에 다시 앉히려고 꾀하다가

모두 죽임을 당 하였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돼 의금부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들에게 둘러싸여 영월군 남면 광천리 태화산 아래의 청령포로 유배를 떠났다.

단종을 유배지로 인도하는 직책을 맡았지만 세조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이 왕방연이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감싸고 흐르는 서강의 물을 보고 그의 괴로운 심정을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라고 노래했다.

단종의 자취가 서린 곳은 충청도와 강원도 일대에 많이 남아 있는데 서면 광전리에 있는 고개는 단종이

유배를 올 때 넘었다고 해서 ‘임금이 오른 고개’라는 뜻으로 군등치(君登峙)라 불렸고, 서면 신천리에

있는 고개는 오랫동안 흐리던 날씨가 단종이 넘으려고 하자 개어 단종이 하늘을 향해 절을 올린 곳이라

해서 배일치(拜日峙)라고 불린다. 또한 단종의 유배를 슬프게 여긴 사람들이 통곡을 했다는 우래 실

(울래실) 마을이 서면 신천리에 있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자규루. 조선 6대 임금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

됐을 때 잠시 머물던 곳이다. 단종은 이 누각에서 자주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자규시를 지었다고

한다. (신정일 기자)

 

단종이 귀양을 와서 머물렀던 청령포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지고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였으며

한쪽은 벼랑이 솟아 배로 건너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는 절해고도와 같은 곳이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그해 여름에 청령포가 홍수로 범람하자 단종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갔다.

단종은 이곳에 서 지내면서 동쪽에 있는 누각인 자규루(子規樓)에 자주 올라 구슬픈 자신의 심정을 시로

읊었다. 자규루는 현재 시가지 한가운데에 있지만 그 무렵에는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서 두견새가

찾아와 울 정도였다고 한다. 단종이 이곳에서 지은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자규시子規詞〉는

구중궁궐을 떠나 영월 땅에서 귀양살이하는 자신의 피맺힌 한을 표현한 것이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우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

봉래산 자락 영흥리의 벼랑에는 단종에 얽힌 사연이 이렇게 전해온다. 단종이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그의 다섯째 작은아버지인 금성대군이 풍기에서 그를 다시 임금의 자리에 앉히려는 계획을 꾸

몄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단종은 1457 년 음력 10월 27일 저녁 17세의 나이에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세조가 보낸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져온 약사발을 마시려고 하는데 화득이라는 사람이 뒤에서 달려들

어 목을 졸라 죽였다. 그다음 날 단종을 모시던 몸종 열한 명이 봉래산 아래 쪽 벼랑에서 동강으로 몸

을 던져 죽었다. 사람들은 백제 멸망의 한을 품고 죽었다는 백제 궁녀의 전설이 어린 낙화암의 이름을

따서 그 벼랑을 낙화암이라고 부른다. 현재 그 위에는 금강정(錦江亭)과 그때 함께 죽은 사람들의 넋

을 기리는 사당민충사(愍忠祠)가 있다.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지만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주검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때 영월의 호장인

엄흥도가 어둠을 틈타 강에 뜬 단종의 송장을 몰래 건져서 동을지산에 묻었다. 그것을 지켜본 일가붙

이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앞을 다 투어 말렸는데도 듣지 않고 “선善을 행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내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하였다. 그 뒤 엄흥도의 충절을 높이 여긴 우의정 송시열이 현종에게

건의하여 엄흥도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고, 영조 때는 죽은 엄흥도에게 공조참판이라는 벼슬을 내리

기도 하였다.

단종이 이곳에 머물러 있을 때 매월당 김시습이 두어 번 다녀갔다고 한다.

그래 매월당은 이곳에 와서 인생이 얼마나 뜬구름 같은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누구냐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미친 듯이 소리쳐 옛 사람에 물어보자
옛사람도 이랬더냐. 이게 아니더냐.
산아 네 말 물어보자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이냐
(중략)
혼이여 돌아가자 어디인들 있을 데 없으랴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있는 단종이 뭍힌 장릉. (신정일 기자)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버려졌던 단종의 무덤은 중종 11년인 1516년에 ‘노산묘를

찾으라.’ 는 왕명에 의해서 되찾게 되었고, 여러 사람의 증언에 의해 묘를 찾아 봉분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때가 12월 15일이었다.

그 뒤 선조 13년인 1580년에 강원감사 정철의 장계로 묘역을 수축하고 그때 상석과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다. 그 뒤 숙종 7년인 1681년 7월 21일에 노산대군으로 추봉했고, 숙종 24년인 1698년

에 추복(追復)해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능호를 장릉이라고 명했다.

어리실 때 입금의 자리를 물려주시고,
멀리 벽촌에 계실 때에
마침 비색한 운을 만나니
임금의 덕이 이지러지도다.
지난 일을 생각하니
목이 메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구나.
시월 달에 뇌성과 바람이 이니,
하늘의 뜻인들 어찌 끝이 없으랴.


천추에 한이 없는 원한이요,
만고의 외로운 혼이라도,
적적한 거치른 산 속에
푸른 소나무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높은 저승에 앉으시어.
엄연히 곤룡포를 입으시고,
육신들의 해를 꿰뚫는 충성을
혼백 역시 상종하시리니.

숙종이 남긴 <노산군의 일을 생각하며 감회를 읊은 시> 중 한 편이다.

그 뒤 엄홍도의 높은 충절을 인정하여 그의 자손들에게 벼슬자리를 내렸고,

엄홍도에게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공조참판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때부터 나라에서는 해마다 한식이면 이곳 장릉에서 한식제를 지내게 되었다.

한식제는 1967년부터 단종제로 이름이 바뀌어서 이 지방의 향토문화제가 되었으며,

매년 4월 15일 무렵 단종제가 열릴 때는 영월군 사람뿐 아니라 전국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살아서 괴로웠던 단종 임금이 죽은 지 오래 되어서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니, 역사는 항상 슬픔을 먹고 사는 것인가.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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